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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less

태권도의 저주를 풀어줘 (4) : 너와 함께이기에 비로소 완성되는 삶

 
사랑은 그럼에도 다시 선택해보는 마음


 

 

주영과 도회가 간직했던 작은 이야기들
널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시간들
네가 올 거라고, 너에게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던 순간들
그리고 너를 포기할 수가 없어 아파했던 나를.
 
우리가 어릴 적 생각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씹어본 현실은 그럭저럭 살아갈 만 하다.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간 후
비로소 텅 빈 내가 아닌 너로 채워지는 순간들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들
그리고 너와 내가 다시 함께 쓰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
아마도
내일 아침을 경쾌하게 시작할 수 있겠다고.
시린 겨울 내내 두근거릴 수 있을 거라고.
도회와 주영이로 인해 잠시 완전해지는 마음으로.

 


_과거를 매듭짓기

같이 가는 캠핑, 팝콘을 나눠먹으며 영상보기, 포근한 침대에서 함께하기.

주영은 술에 취해 먼저 잠든 도회의 이부자리를 정리해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이렇게 오기까지 힘겨웠을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아침을 깨우는 인기척에 주영이 눈을 뜨고 도회를 확인한다.

주영의 입가에 사르르 번지는 미소.

 

하나의 비밀을 각자의 방식으로 숨겨둔 채 올라오는 서울길.

도회는 문득 차 글로브박스에 주영이 숨겨둔 비밀을 확인해본다.

입시에 연달아 실패 후, 일산에서 강사로 자리잡은 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12년 동안 도회가 실종될 수밖에 없었던 전말 앞에서 주영은 자꾸 눈물이 난다.

 

그런 네가 안쓰러워서, 그랬던 네가 겪었을 아픔이 가여워서,

그리고 그 모습을 숨기려고 자꾸만 내치는 네가 너무 두려워서.

 

다시 일부러 상처를 주고 떠나려는 도회.

차마 떠나라는 말이 입에 떨어지지 않는다.

뒤쫓아가는 주영이 묻는다.

"내가 뭘 어떡할까"

"누가 뭐 어떻게 해달래?"

돌아서 말대꾸하는 도회.

 

"도회야, 나는 있잖아.

다시는 너 안 떠나고 싶어.

내가 진짜 싫어진 게 아니고 꼴도 보기 싫은 게 아니면 그런 말 하지마.

너 왜 자꾸 나 버리려고 해.

제발 나 좀 버리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니가 제발 꺼져달라고 내가 너무 싫다고 빌 때까지 끝까지 옆에 있을게."

절벽 끝에 선 주영이 날것의 감정을, 간절한 바람을 도회에게 고백한다.

 

"니 탓 아니야.

나는 아빠랑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내가 한설대라고 하면 과거가 어떻든 다 좋아해줘.

날 증명할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어서, 그래서 그랬어."

도회도 주영을 사랑하고 있음을, 그저 이 모든 게 지독한 저주에 꼬였을 뿐임을 말해준다.

 

울먹이는 도회를 바라보는 팔척귀신, 아니 팔척 테디베어가 앙증맞게(...) 눈물을 글썽인다.

팔척테디가 이내 기운차게 도회를 데려간 곳은 저주의 기원, 태권도장.

 

도장의 물건들을 마구 찢고 부순다.

우리가 힘들어한 과거, 폭력, 방관, 그리고 그때의 나.

불속에 내던진 흔적. 활활 타오르는 과거.

 

주영이 고개를 돌려 도회를 바라본다.

타오르는 불처럼 고통이 정화됨을,

얽매여 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원래의 나로 돌아왔음을.

도회와 마주한 시선에 주영이 씩 웃으며 곁으로 다가온다.

우리를 괴롭힌 죄책감에게 비로소 잘 가라는듯이

불빛이 한참동안 둘을 비춘다.

 

한겨울 불에 태운 흔적 앞에 후련한 입김을 내뱉는 둘.

실없는 농담이 김서린 호흡처럼 가볍게 하늘 위로 사라진다.

"야, 출출하지 않냐. 뭐 먹고 싶어."

"간장계란밥"

"내가 만들어줄게. 가자."

 

 

 


_어쩌면 더 큰 너의 사랑이

아, 그건 그렇고 잠자리에서 주영이 슬그머니 고백한다.

"사실.. 나 백수야. 짤렸어."

이런저런 얘기들. 조금은 현실적이 된 주영과 조금은 이성적이 된 도회.

 

의외로 현실은 불가역적이지 않았다. 다만 후진에 많은 마찰이 튀길뿐.

광모를 위해 경찰에 신고하고 학원에서 짐을 빼고 거센 비판을 감수한다.

못다한 현호와의 얘기까지 모두.

 

학력위조의 댓가는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는 도회.

2년제부터 유학까지 맞춤 컨설팅을 해주는 주영에게 물끄러미 말한다.

"너 태권도 해야지. 희생은 하지도 마."

도회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세속적 가치에 부합하는 거라는 걸 인정해본다.

 

그런 도회에게 해주는 말.

"어디 책에서 그러더라.

사치 부리지 말고 편하게 잘 수 있는 공간만 있음 된다고.

우리 그냥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그럼 네가 나 좀 고쳐보든지. 신주영 닮게."


 

도회 부(父)의 산소에 들른 후, 도회는 추억의 다리를 건너며 회상한다.

"그때 여기서 키스했을 때, 처음으로 앞으로 행복하겠다 생각했어.

힘든 일이 있어도 다 견딜 수 있겠다. 얘만 있으면 즐거울 거 같다."

 

그러지 못했던 과거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주영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내 무의식이 알았던 것 같아. 신주영이 있는 곳으로 가면 다 그만두고 멈췄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래서 굳이 거기까지 갔나봐. 너 만나려고."

 

주영이 성큼성큼 다가와 도회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넣는다.

맞물린 손깍지를 바라보던 주영이 말한다.

"역시, 똑똑해서 딱 잘 왔네.

우리 아직 어려. 그리고 우린 지금 

벌써 남들이 평생 찾아헤매는 사랑을 이미 만났잖아.

그게 어디야.

난 그걸로도 삶의 큰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하는데."

 

흐뭇하게 앞서가는 30대 수험생에게 키스가능여부로 드립을 치는 주영.

몇 번의 농담따먹기. 그리고 농담을 가장한 장난스런 입맞춤.

신난듯 빙그르르 도는 주영과 허리에 손을 올리는 도회.

 

돌아가는 차 안에서 도회가 슬그머니 주영에게 손을 내민다.

부끄럽지만 기분좋은 주영의 입이 찢어지고(...) 큰 액션으로 맞잡는다.

"가족이 되어줘서 고마워."

도회의 고백에 주영은 2차로 입이 찢어지게 웃는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지. 너의 입에서. 


여느 커플처럼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둘.

간만에 분위기 좀 내겠다고 준비한 주영에게 장난을 좀 치고

크리스마스 뽀뽀를 해주는 도회.

주영이 가려는 도회를 붙잡고 다시 부드럽게 입술을 포갠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성껏 하는 입맞춤.

 

주영은 잠결에 옆을 더듬으며 없어진 도회를 찾는다.

못다한 공부를 끝내던 도회는 지식인 답변 채택 알림을 보게 되고.

주영과의 옛 추억을 되짚는 질문 목록을 확인하게 된다.

아이스크림, 집밥, 눈 만들기, 그리고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했던 질문들.

네가 나에게 품은 마음이 커서. 오래되어서. 그리고 그런 너에게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서.

 

그렇게 숨죽여 웃다가 우는 밤. 

그렇게 너를 사랑하겠다고,

그렇게 너와 내가 무정한 세상을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차게 하고, 굳세게* 살아갈 수 있겠다 생각했던

밤, 크리스마스 이브.

 

 

CUT TO BLACK: -THE END-

 

 

*이광수『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