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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less

태권도의 저주를 풀어줘 (3) : 널 사랑하는 게 너무나 아픈 고통임을

사랑 앞에서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주영이 간직해온 마음은 12년을 지새우며 녹이 슬었다.
다시금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대는 순간, 주영은 완전히 마비된다.
시큼한 황홀함. 그리고 너무나 시린 도회의 말과 눈빛.
매몰차게 내쳐지는 순간마다 주영의 마음이 찢어질듯 아려온다.


세속의 뻔한 물질주의는 별볼일 없는 주영의 옆구리를 날카롭게 찌른다.
잠시 도회의 저주를 풀고 달콤한 순간을 맛보지만
작위적인 기적 이면에 도사린 실망감이 주영에게 겁을 준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고민 끝에 주영은 도회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지금 모습 그대로.


도회는 주영을 끊임없이 유기한다.

유리컵을 건네며 스친 손을 경멸하듯 거리를 둔다.
주영의 턱 밑에 뻔뻔하게 성공의 증거를 전시한다.
급기야 자신들의 사랑마저 농담거리로 전락시킨다.
그순간 화가 치미는 주영.
실망의 겹이 촘촘히 쌓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변해버린 도회를 바라보는 눈에는 욕망과 절망이 뒤엉켜있다.
한눈에도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이토록 그가 증오스러움을.


도회는 수능날 결심했다.
자신이 주영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폭력을 증오했으면서 그 폭력에서 혼자 벗어나기 위해 주영을 방치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랑보다 안위를 택했고 그런 자신에게 극도로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를 급하게 밀어내는 도회.
사랑은 거세된 선택지일 뿐. 
온갖 모진 말로 주영의 마음을 후벼판다.
단지 이 모든 건 주영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기 때문에. 

태권도장은 도회에게 폭력이자 과거, 그리고 영원히 잊고 싶은 자신이다.
이곳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은 주영이다.
그런 주영의 매도 권유에 도회의 눈빛이 번뜩인다.
 
"너 등신이야? 누가 신고했겠어."

잔인한 진실을 가장 비열한 모습으로 포장한다.
 
"난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니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제발 내 인생에 다시 나타나서 끼어들 생각도 말고 도와줄 생각도 말고
그냥 모르는 사람하자. 제발."

 

 


주영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진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사이 다시 유기됐다.

 

 

 

 

 

"하지마. 그렇게 생각하지마.
내가 잘못한건데 내가 너한테 비겁하다고 얘길 왜 해.
너니까 더 힘들었을 거 아니야.
미안해. 그것도 모르고."


12년 전 도회가 남기고 간 쪽지를 건네며 이제야 읽었다고 말해주는 주영, 그리고..
"누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냬.
나 너 밖에 생각이 안나.
나랑 니가 계속 같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뭐든 열심히 하려고 했던 그때, 가진 거 아무것도 없어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 것도 그때가 처음이고.
...서울 같이 가자며."
 
그 순간 둘의 머리 위로 눈이 내린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주영과의 행복했던 순간들.
너무나 아파하는, 그리고 지쳐보이는 주영이 눈앞에 보인다. 


도회의 동공이 커진다.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너.
저주에서 잠깐 풀려난 도회는 눈앞의 사랑에게 홀린듯이 입술을 포갠다.
주영은 도회인지 확인하듯 입술을 가만히 맞댄다.
도회가 조금 더 입을 열고 주영의 입술을 부드럽게 문다.


주영은 맞물린 입술로 도회임을 느낀다.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 도회를 끌어안는다.
좀 더 깊이 그리고 부드럽게 도회의 아랫입술을 빨아본다. 
눈을 감은 주영의 달뜬 얼굴과 본능적으로 엉키는 입술, 그리고 붉게 달아오르는 뺨.

이내 도회가 정신을 차리며 입술을 뗀다.
감았던 눈을 뜬 주영은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황홀경이다.
무의식적으로 다시 입맞추려고 하는 주영을 도회가 저지한다.
 
달콤한 어지러움. 너무나도 명백한 두근거림.
도회로부터 한 발 물러선 주영은 아랫입술을 쓸더니 김이 서린 호흡을 천천히 내뱉는다.
한껏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설렘이 둘을 맴돈다.

"서울 같이.. 가자"
서로를 정확히 마주보는 눈빛.



 
서울로 돌아가 도회의 집에 방문한 주영.
현호의 등장은 주영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
점점 분노가 치민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얼굴에 쓰인다.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내일 연락한다는 도회에게 말한다.
"뭘 내일 연락해. 잘 때도 하고 내일도 해."


집을 나선 주영의 표정에 이전과 다른 생기가 돈다.
결심한 듯 차고 있던 십자가를 뺀다.
 
경쟁자에 대한 천재적인 촉.
지연된 사랑을 재개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겁다.
쉰다는 도회의 말에도 계시를 받은 마냥 밤늦게 무작정 찾아가는 주영.
"말을 하고 오던가"
"얜 왜 왔는데. 둘이 같이 살기라도 하는 거야?"
직진하는 주영은 불투명한 도회의 반응이 신경쓰인다.
하지만 유치한 주도권 다툼에선 절대 지기 싫다.

"한 대 치게?"
"못 칠 건 없지."

다급하게 주영의 이름을 부르는 도회.
주영의 진심이 다시 한번 임계치를 넘는다.
 
불안한 마음이 커진다.
자신과 같은 마음이 맞냐고 돌려묻는 주영에게
도회가 거칠게 입술을 맞추며 답을 알려준다.
낮선 모습을 볼 때마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만큼 커져가는 답답함.

 

그리고 그럼에도 도회가 한 걸음씩 다가오며 하는 질문을, 훑는 시선을 거부할 수 없다.

"나한테 온다고 이런 거 입고 온거야?"

의도적인 유혹에 푹 빠져버리고 싶은 욕망이 주영을 침묵하게 한다.

몸이 섞이고 이전보다 노련하게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조금은 어색하고 풋풋했던 그때가 자꾸 눈에 밟힌다.

함께 있지만 한없이 외로운 밤.

 

과거에 머물러 있다 겨우 도회를 추억했던 싸구려 술집까지밖에 앞서나가지 못한 주영은,

도회에게 묻어있는 경멸이 실망스럽다. 

둘이 다시 마주한, 이제는 좀 더 교묘해진 폭력 앞에서 도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절을 택한다.

사무치게 낯설다.

그럼에도 어쩌면, 새로 받은 지갑 속 각인처럼 기대해봐도 되는걸까.

 

주영은 도회의 새빨간 거짓말을 조금씩 들춰보기로 한다.

위스키, 건축학, 세련된 집, BMW.

유명 작가의 건축도면을 붙여놓은 도회에게 묻는다.

주영: 이거 뭐 그린거라고 했지?

도회: 뭐긴, 집이지.

주영: 니가 살고 싶은 집.

도회: 그냥 집. 왜.

주영: (체념하듯) 대단해서. 멋있어서.


세속적 가치에 순응하는 법을 배운 도회는 그런 주영이 거슬린다.

아니 두렵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한 일부만 주영에게 내어준다. 
주영은 거짓말로 뒤덮은 자신까지 모두 알려고 한다.
다시 한번 누군가에겐 오지랖, 누군가에겐 진심.
주영의 직진이 도회에겐 무섭고 고통스럽다.

 

"목걸이 다시 뺐네. 다시 이기적으로 굴기로 한거야?"

십자가보다 더 큰 마음 때문에 한 각오가 빚는 이토록 엇나간 오해.

널 사랑하기 때문에 했던 일.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이 커지는만큼 '그 잘나고 멋진 신념'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너.

도회는 주영에게 지금 네가 하는 게 사랑이 맞냐고 되묻는다.

도회에겐 폭력의 기원, 주영에겐 첫사랑인 도장을 두고 둘은 크게 충돌한다.

주영은 사랑을 부정당한다. 아니, 자신을 부정당한다.

다시 한번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 

"진짜.. 너한텐 우리가, 아니 내가.. 진짜 가볍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 거친 호흡을 떨리듯이 내뱉는다.

주영은 도회가 세운 단절의 벽 앞에서 한없이 고통스러워한다.

너의 모든 걸 알고 싶었는데 나에게 허용된 아주 작은 일부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서 해본 말이

곧 이별이 되고 만다.

 

성급하게 꺼낸 욕망으로 저지른 12년 전과 똑같은 실수.

도회는 눈앞에서 사라졌고, 다시 찾아온 지독한 공허.

그리고 이대로 널 안보고 끝내면 후회할 것 같다.

 

"내가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이제 진짜 니가 싫어하는 얘기 안 할게.

나랑 놀아줘."

주영을 보고 웃어주는 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