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언뜻

Bitter Sweet Symphony, 달콤살벌한 인생

 

The Verve의 Bitter Sweet Symphony

 

웅장하고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오케스트라 샘플링과

대비되는

하찮고 사소한 인생

 

주기적으로 인생에 대해 생각해본다.

 

 

Tryna make ends meet, you're a slave to money then you die

생계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너는 돈의 노예가 되고 죽고 말겠지.

 

I'll take you down the only road I've ever been down

내가 걸어본 유일한 길을 보여줄게

 

No change, I can change

(중략)

But I'm here in my mold

I can't change my mold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난 변할 수 있어

하지만 여전히 내가 만들어진 틀에 남아있지

내 틀을 바꿀 순 없어

 

Well, I've never prayed but tonight I'm on my knees

기도해본 적 없지만 오늘밤은 무릎꿇고 기도할래

I need to hear some sounds that recognize the pain in me

어떠한 소리라도 좋으니 들어야 겠어, 내 고통을 알아줄 그 어떤 소리라도.

 

 

애쉬크로프트는 세기말에 인간의 존재론적 현타를 강하게 받고 만다. 

물질만능주의에 휩쓸리다 죽고마는 인생이 허무하다가도

모두가 그런 길을 택하고마는 것임을 상기한다.

 

변화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자신은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정작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곤 여태껏 해보지 않은 기도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제발 누군가 이 존재론적 고통을 알아채주기를 바라면서.

 

아름다운 선율이 그의 마음을 휩쓸고 정화하며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그 순간,

아무도 그에게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음을 자각한다.

 

굉장히 사회철학적으로 중요한 장면을 묘사했는데

이게 핵심이다.

인간은 존재론적 위기를 인생을 살면서 수도없이 마주친다.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걸어온 유일한 길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바로 진정한 자유는 홀로 됨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애쉬크로프트가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은 그 자신이 만들어내고 허용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거의 모든 것, 성공, 성취, 돈, 명예 등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내가 나에게 허할 수 있다.

내가 돈을 나에게 허하는 것이고,

내가 나에게 성공을 허하는 것이고,

내가 나에게 멋진 인생을 허하는 것이다.

 

애쉬크로프트는 태어난 환경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틀렸다.

그는 이미 곡 안에서 자신을 구원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사회가, 이 세상이, 사람들이 그를 허하지 않았다.

아니, 허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정작 정말로 허하지 않은 주체는 본인 자신임을 망각하며.

 

그렇게 장난감 정병처럼 어제가 오늘, 오늘이 어제인 쳇바퀴 인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걸 깨달았다면. 

내일은 다를 것이다.

내일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는 변화할 것이다.

 

그의 노래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위풍과도 같은 대히트를 친 것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고찰은 올타임 베스트셀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