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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21세기 아담에 관하여

 

 

몇년 전 박민규의 책을 다 읽고 그의 후기를 읽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되지 못한 아담에 대해 고백하였다. 그 고백은 매우 익숙하게도 충격적이었고 나 또한 한동안 그의 고백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고백한, 되지 못한 아담은 아름다움의 절대 수준에 관한 짤막한 단상 같은 거였다.

과연 우리는 아름답지 않은 그 어떤 것에 충분히, 열정적으로 관대할 수 있을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뜨거운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것은 의외로 큰 에너지를 요구한다. 정신적으로 온통 마음이 빼앗기므로 그만큼의 행복이 담보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랑할 대상은 그냥 아무렇게나 정해지지 않는다. 내가 사랑할 대상이든 사람이든 그만큼의 근사함이 있어야 하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높은 확률로 사랑의 대상은 아름다운 경우가 많다.

이 아름다움은 보통 대상의 매력과 결부될 때가 많고, 그 매력에 외관도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쩔 수 없게도, 우리는 시각적인 정보에 홀리기 마련이고 그래왔다.

그래서, 더더욱.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에 등장하는 핀은 21세기 아담이다. 박민규가 말했던, 자기를 대신해서 흔히 사회에서 일컬어지는 '못생긴 여자'-이 시리즈에서 정확하게는 뚱뚱한 여자-를 사랑해 줄 네오 아담 말이다. 21세기 아담이라. 시리즈를 보면서 나는 특유의 드라마틱함에 강하게 빨려들어갔고, 어쩔 수 없이 '근사한' 핀의 모습에 급격하게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계속 핀과 레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실제 극중에서는 레이도 핀과의 사랑에 의문을 품게 된다. 너무나 완벽한 남자, 그리고 너무나 완벽하지 않은 여자. 21세기 아담이 누굴 사랑하든지 그것은 딱히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통념상 아담에 알맞은 이브가 선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잔인하도록 이브가 그의 옆에 있기를 기원하는 이 세상에서 강렬하게 그와 함께 하는 것은, 엄청난 거구의 정신병 경력이 있는 레이.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지만, 속마음도 케이크와 같이 부드러운 21세기 아담이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그것도 가장 그럴듯하지 않은 여자에게. 이 믿기지 않는 판타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철없이 이런 판타지가 현실이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이 판타지는 영원히 상상 속에만 존재해야 한다고 나에게 다그쳤다. 현실에서 아담이 가장 이브같지 않은 여자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대부분 겉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이기에.

물론 레이 캐릭터는 겉모습을 상쇄시킬 만한 매력이 있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가 개연성을 잃지 않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레이를 오직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핀의 모습은 나를 시험한다. 그의 모습에서 새록새록 드는 여러가지 의심들과 그 의심을 깨부수고 나서 마주하게 되는 핀의 간절한 모습은 뫼비우스의 띠 같이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 라는 괴로운 판타지에 빠지면서.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는 분명, 판타지이다. 그것도 로맨스 판타지. 속칭 '주류'에 들지 못하는 여자가 완전한 주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가장 통속적인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이젠 그만 나왔으면 하는 지루한 소재이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끝까지 보게 되었다. 첫번째는 물론 레이를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등장하는) 핀 때문이다. 나는 끈질기게 핀을 연기한 니코 미랄레그로가 한번이라도 그의 캐릭터를 연기함에 있어 주저함을 보이는 순간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핀은 간절하게 레이의 사랑을 원하고 있었고 절망스럽게 근사했다. 레이의 사랑을 갈구하는 21세기의 아담이라, 두고두고 생각해볼 일이다. 어쨌든 이 판타지를 넋놓고 보고 있자니 스멀스멀 레이의 어두운 과거와 거대한 모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자해할 가능성이 있으며 (물론 많이 나아졌지만) 거구의 레이라는 캐릭터는 온갖 '단점'들을 갖고 있음에도,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약간 놀랐는데) 21세기의 아담을 비롯해서 몇 명의 남자들과 로맨스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가진다. 탈 편견적인 노선을 타는 의도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러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라는 장르가 허구인 것은 익히 알지만 핀과 레이의 사랑 앞에서 나는 결국 확신하지 못하고 말았다. 환상적인 브릿팝들이 귀를 즐겁게 해주는 와중에도 난 어느새 레이를 응원하고 있었고, 핀이 혹시라도 잘못 대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런 내 자신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느꼈다. 왜 이 이야기를 판타지라고 생각해야 하지? 이 이야기는, 이 이야기는 갑부집 인물과 결혼하는 '신데렐라'도 아닌데, 대체 왜? 21세기 아담 따위가 뭐라고 레이첼 얼과 사귀는 게 그렇게 문제가 된단 말인가. 둘이 좋으면, 그것만으로 된 것 아니냔 말이다. 결국 나는 '세상은 겉모습에 관대하지 않다'는 학습에 사로잡혀 드라마를 보면서까지도 그 학습의 틀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황하게 매드 팻 다이어리를 본 단상을 적었지만, 사실 이 모든 현실적 잡상을 접고 나면 이 시리즈는 굉장히 즐길만 하다. 그냥 빠져들면 되는 근사한 캐릭터들, 주옥같은 80-90년대 브릿팝의 멜로디 등. 역시 두말하면 입아픈 니코 미랄레그로의 훈훈함과 몸매는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구경거리다. 거기다가 살인적인 미소까지 더해지면 억울하게도 그 얼굴이 계속 생각난다. 한숨과 함께 어찌나 멋있는지.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제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여전히 하나뿐이다. 

오아시스를 비롯해 스톤 로지스와 블러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레이, 결국 그녀로 모든 것은 회귀하기 마련이기에, 나에겐, 레이첼 얼이 가장 완벽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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